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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D/Story

단편 소설 - 체온

농도 짙은 푸르스름한 기운의 새벽녘.

그 새벽녘을 타고 흐르듯 다가온다.

익숙한 느낌들.

난 누워 있는 채로 천천히 눈을 떠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바라본다.

가느다란 새벽녘 빛으로 가늠할 수 없는 그림의 윤곽들.

하지만 이미 알고 있기에 천천히 더듬고 더듬어 그림에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그려낸다.

군데군데 하얗게 칠이 벗겨진 오래된 나무 액자틀 안에 겨울강가의 풍경이 차갑게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림 중앙 깊게 자리 잡은 짙은 검푸른 강.

강 한가운데 길고 작은 조각배.

그 안에 화사한 붉은 색 코트를 입은 어린 소녀.

강가의 주위를 둘러싼 앙상히 젖어 있는 자작나무들.

그 황량한 그림 속에 모습들이 내게 스며든다.

오늘의 아침은 나를 이렇게 깨워야만했다.

 

12월 16일 

 

소파에 다리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고 짙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는 잔인함에 충동적으로 친구 대신 나가게 된 소개팅 상대방에게 못 나간다고 음성을 남겼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불러야만 하는 그와 그의 여자의 모습이 지독히도 보기 싫어 핑계처럼 집어든 소개팅이라는 약속을 나는 다시 충동적으로 던져 버렸다.

번잡한 일요일. 휴일을 즐기기 위해 나온 많은 사람들 무리에 섞여 오늘 하루를 혼자 무엇을 해야 할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생각했다. 문득 무의식중에 화장대에 있던 책을 집어 들고 나왔다는 걸 기억해냈다.

가방에서 꺼낸 책은 책제목이 마음에 들어 샀던 것이었다.

“ 이 방 인”

그 단어는 나에게 속한 단어처럼 느껴졌다.

첫 장을 넘기면서 점점 단어들이 나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과 나.

둘은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려 했던 나는 첫 장만을 넘겨 놓고 멍하니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나는 지하철 안내방송에 정신을 차리고 소개팅 장소와 가까운 역에서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어디로 향해 가야할지 분명했지만 난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소개팅하기로 되어 있던 장소를 향해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상대방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가장 구석 눈에 띠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난 약속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빨리 도착했다.

의미 없이 약속된 시간에 관한 한 시간의 여유

 

PM 3시

 

간단한 칵테일을 주문하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연인들.

어린 아이들과 있는 가족들.

학생들.

편한 복장의 사람들은 환한 얼굴로 바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칵테일이 나오고 첫 모금. 달콤했다. 그리고 안정된 감정을 느꼈다.

알콜중독자의 나약한 정신이 받는 유혹처럼.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아님 몇 분, 몇 초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순간이 지나고 가방에서는 핸드폰 벨이 울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든 나는 내 앞에 멈추어서는 남자의 목소리가 내 핸드폰과 공기 중으로 내 고막을 울리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 반갑습니다“

그 말 후에 그는 핸드폰 폴더를 닫고는 내 맞은편에 당연한 듯이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내 칵테일 잔을 보고는 그는 의미 모를 미소를 살며시 지었다,

“ 못 나온다는 음성을 받았는데 약속시간보다 빨리 나오셨내여?”

아무의식도 없이 있던 나는 그의 말에 Cafe 벽에 붙어 있는 전자시계를 보았다.

 

PM 3시 40분

 

담담하게 그의 시선을 받아 내며 대답했다

“ 그런 것 같네여”

나는 칵테일로 손을 뻗어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오셨더군여...”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약간 눈썹을 올렸다 내리며 의문을 표현했다.

“ 아...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보지마세요 ”

너털한 웃음을 지으면서 캐주얼 자켓을 의자에 걸치는 그

“ 사실 여기 Cafe를 제가 운영하고 있어서, 들어오실 때부터 줄곤 보고 있었는데 주문도 제가 받고 갔다드렸는데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으시고 창밖 풍경에 빠져 계시더군요”

“ 그랬나요..” 칵테일 다 마시고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 저 인줄은 어떻게 아셨는지?”

“ 저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제가 전화를 걸 때 ...참 성함이?”

“ 정우... 이 정우 라고 해요”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면서 그의 관심어린 시선에서 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 전 박 태형입니다.” 탁자에 팔을 기대며 몸을 앞으로 숙이는 그.

“ 정우씨가 주문하실때 목소리가 낯설지가 않아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남기신 음성을 3번이나 다시 들어보고 나서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전화를 해 본겁니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는 것에 왠지 즐거운 듯했다.

“ 맥주 하시겠습니까?” 잔이 빈 걸 본 그가 권했다.

“ 아니오. 빈 속이라 더는 마시고 싶지 않네요”

“ 그럼 나가실까요? 저녁을 조금 이른 저녁 먹죠 ”

그는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 말은 건넸다.

시계는 어느새 5시 10분에서 흘러가 버려 있었다.

시간이란 참 묘하게 흘러 가버림으로 나를 당황시키곤 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마 유쾌한 그가 맘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Cafe를 나가자 많은 사람들 틈으로 섞여 나도 이제 휴일을 즐기는 한 무리들 중에 하나인 셈이 되었다.

“ 가까운 곳에 제가 좋은 음식점을 알고 있는데 그리로 가시죠 ”

말없이 걷던 그와 나

“ 제가 듣기에는 스물 넷 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는 뒤를 돌아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르던 나와 부딪쳤다.

마치 그의 품에 안기듯이.

“ 미안합니다.” 그는 나의 팔을 잡아 균형을 잡아 주었다.

“ 괜찮아여”

그의 품을 빠져 나오면서 난 평정을 되찾으려 무척이나 애를 써야 했다.

“ 스물 여덟이예요. 친구 부탁으로 그 분 대신 나왔죠”

약간에 동요가 섞인 목소리였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잠깐 동안 그의 품에서 잊고 싶은 그 어떤 그리움을 느낀 것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의 행동과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했다.

이미 오래 전에 잊기로 결정지었던 감정들. 없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 아.. 그러셨군요. 어쩐지 솔직히 생각보다 음.. 뭐랄까?”

“ 나이 들어 보였다는 말이죠 ?” 어떤 감정도 억양도 없는 단순히 질문이었다.

“네... 아니오... 그냥 스물넷인 여자의 분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성숙해 보였다고 할까요?” 약간은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가 나의 시선을 살폈다.

“기분 상하셨나여?”

“아니요”

그와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란히.

그는 식당에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이 Cafe을 하게 된 일을 이야기했다.

친구 세 명과 공동출자해서 한 것이 잘되어서 지금은 각자 분점을 가지고 독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거의 혼자 말하다 하던 그가 물었다.

“ 말이 없으신 편이신가요?”

그는 깔끔한 한정식으로 나를 데려갔다.

“ 그런 편이예요”

그의 말에 ‘그래여, 아니여, 그런 것 같아여’라는 세 단어가 주기적이고 반복적이었기 때문이다.

“ 음.. 제가 맘에 들지 않으신 건가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화가 난다는 느낌도 없는 그냥 궁금해서 묻는다는 투에 그의 말에 호감이 갔다.

“ 아니오. 그런 건 아니예요. 제가 그리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싫은 사람과 오래 같이 있기 힘들죠”

“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

그는 살짝 표정이 풀리는 듯 했다 .

긴장 했던 것일까?

식사가 차려지고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 생활 등

식사 내내 나에게 유쾌하면서도 유연하게 대했다.

물론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학원생이라는 것. 전공이 심리학이라는 것... 동물을 싫어한다는 것이 내가 그에게 내준 정보가 다였다.

이것조차 그가 자신을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 간간히 질문을 통해 단답적인 대답이었다.

식사는 어느새 2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잡아먹었다.

 

PM 8시 10분

 

“ 가볍게 칵테일 하시겠어여?”

그는 나에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물었다.

“ 네”

그는 나의 팔을 잡고 그의 Cafe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 전 제 Cafe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서 멋지다고 자부하지만 전망이 그리 좋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는 20층쯤 되는 건물 스카이라운지에 나를 안내했다.

창가에 자라 잡은 그와 나는 좀 진하게 마시기 위해 양주와 과일안주를 주문했고 그는 그 곳 주인과 아는지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스카이라운지는 통유리가 빙둘러 있어 마치 야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두르고 있는 곳이었다.

“ 정말 아름답다는 표현”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밑에서 작게 움직이는 사람과 차들, 현란한 네온사인. 지독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난 아까 그 Cafe의 전경이 더 세상과 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곳은 그냥 환상이다.

하루 밤에.

난 딱할 정도로 이성적인 인간이기에 이곳에 대한 반발감마저 일었다.

하지만 내가 한 것은 야경을 무시한 채 위스키에서 얼음이 차분히 녹아나는 걸 감상하는 것외에 없었다.

그는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두 번째 잔을 비우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친구 녀석이 하도 캐물어서.”

“ 네”

“ 사실 정우씨에 대하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말해 줄 것도 없었죠 ”

그의 말에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만 난 그에게 알게 해줄 생각이 없다.

누구에게도.

잠시 Jazz의 선율만 둘 사이의 공간을 차지했다.

“ 예쁜 반지군요. 마치 약속된 의미의 반지처럼”

그의 눈빛은 대답을 요구했다.

잠시 불빛에 반사되어 깊은 빛을 발하는 다이아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어쩌면, 그럴 수도 있죠 ”

나는 느릿하게 대답하고 위스키 잔을 입술을 살짝 적셨다.

2년동안 서서히 죽어가던 어머니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젊은 여자들을 쫓던 아버지.

어머니가 차갑게 세상과 나를 등지던 날.

어머니 손에서 깊고 고혹적이게 반짝이던 거짓된 약속의 결혼반지를 빼서 내 손에 끼었다.

잊지 못할 약속이. 내게 존재치도 않을 것 같은 영혼에 새겨졌다.

“ 특별한 의미. 남자에게 받은 겁니까? ”

그는 나에 눈을 바라보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듯이 물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 없음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다른 식으로 내게 있는 진실을.

“ 남자 일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누군가의 손을 거쳐서 내가 훔쳤으니까요 ”

“ 누군가에 것을 훔칠 것 같지 않아요. 정우씨는...”

묘한 그와 나의 시선이 부딪쳤고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해기 위해 술병을 들어 나의 잔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곧 그가 술병을 빼앗아 나의 잔에 따르고 얼음 두 조각 넣었다.

“ 술을 잘 하시는 군요”

위스키 잔을 흔들어 얼음에 차가움이 잔에 물방울로 맺히길 기다렸다.

물방울에 차가움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길.

미국 유학시절 심리학 교수가 강제로 마시게 한 술로 시작해서 단 한 번도 취해본적 없다.

그 교수는 나를 통한 쾌락을 바래겠지만 대신 다음날 지독한 숙취로 시달려야만했다.

“ 취해 본적 없어요”

나른하게 울리는 Jazz 속에 심장박동도 죽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식사 때와 달리 거의 말이 없이 마치 유명한 명화를 감상하듯 나의 행동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은 또 어의 없이 흘러가 버리고 있었다.

 

12월 17일 

 

AM 2시 5분

 

그와 나는 안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위스키 두 병을 비우고 스카이라운지에서 나왔다.

전화로 모범택시를 부르는 그는 잠시 나의 얼굴을 살피는듯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서서 아직도 화려한 네온사인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범택시가 도착하자 그는 나를 태우고 자신도 옆에 따라 탔다.

“ 집이 어디시죠? ”

나에게 묻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난 눈을 감았다.

잠시 차 안은 침묵에 잠겼다.

백밀러로 그와 나를 쳐다보는 택시기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짧은 침묵을 깨고 그가 어떤 동네의 이름을 말했고 어렴풋이 집과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택시는 늦은 시간 밤을 가르고 속도를 내어 달렸다.

택시 안 가득 인공의 빛들이 밀려들었다 빠져나가는 것이 반복되어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을 형이상학적인 번짐이 내 시야를 채웠다.

당연한 듯 기대 있는 그의 어깨에서는 묘한 따뜻함이 스며나와 나의 몸을 따뜻함으로 얼룩지게 하고 있었다. 그 묘한 따뜻함이 나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어 이 잠깐의 순간에 나의 무엇인가가 깨어질 듯 위태롭게 하고 있다.

‘ 지켜야 하는 걸까? 이 위태한 것을 난 지켜야 하는 걸까?’

스스로의 질문에도 응답할 수 없을 정도로 난 무엇인가 고장나있었다.

택시는 오피스텔 앞에 멈추었고 나는 필요치 않은 그의 부축을 받으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그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나를 데려가는 동안에도 나를 부축했다.

나 또한 그의 품에서 아무런 말이 없이 그렇게 있었다.

주위는 가로등과 침묵으로 감싸인 어둠이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는 것 같았다.

 

AM 3시 47분

 

그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안은 창에서 스며드는 어슴푸레한 빛은 모든 것을 비현실적 부분처럼 비추어 놓았다.

그에게 이끌려 들어서는 그 작은 몸짓으로도 나의 무엇인가는 그 몸짓에 대한 어떤 감정도 발동시키기를 거부했다.

불도 켜지 않은 그 상태에서 그와 나는 주위을 사물들과 가만히 녹아들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완연하게 끌어안았다.

택시 안에서부터 집까지 도착한 그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동안 그와 나는 아무 말도 그 어떤 질문과 동의 없는 그런 상태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안겨 그의 심장박동이 정상인보다 빠르게 고동하는 것을 감상해야만 했다. 귀안 고막을 은은히 두드리는 생경한 소리의 화음을 말이다.

그가 움직인다.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그 방에서의 단 하나의 움직임이 되어 살아났다.

사람의 체온이 담긴 아릿한 손길이 머리카락 하나까지 일일이 일깨우는 듯하다.

나를 그는 그렇게 달래듯이 다루는 그의 심장은 오히려 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서도, 아버지란 사람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는 살아 있는 사람의 고동소리에 나는 유혹받았다. 그 생경한 경험을 더 연장하고픈 마음에 마치 다른 사람의 팔인듯 늘어져 있던 것을 움직여 그를 안았다.

그의 심장고동은 조금 더 빨라져 갔다.

그의 손길이 조금은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그의 심장 고동 소리에 취해 있던 나는 어느새인가 그와 함께 소파에 아기처럼 안겨 있었다.

“ 따뜻해여....”

그의 품에서 속삭임은 그 공간의 공기 중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나에게 입술을 포갰다.

그의 입술은 심장의 고동소리만큼 따뜻했으며. 가늘게 나의 입술을 떨리게 만드는 묘한 설레임을 머금고 있었다. 지극히 위험하고 유혹적인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을 느끼는 순간 거칠게 그의 품 안에서 빠져 나왔다.

그 키스 안에 담긴 건 욕정이나 욕망이 아니었다. 좀 더 따듯한 그 무엇인가이기에 나는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는 잠시 당황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평정을 찾는 듯 했다.

나도 평정을 찾아 냉정한 나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 나의 표정을 그러했을 것이다.

“ 미안합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의 말은 흔히 남자들이 뱉는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감정을 느껴버린 나였기에 그것이 진심임을 알았고 이런 생각이 ‘자신에 대한 배반’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 아니요. 제가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는지 저도 모르겠군요”

현관에 떨어져 있는 가방은 ‘이방인’이라는 책을 토해 놓고 있었다.

나를 일깨우듯.

“ 집에 가기 싫으셨던 것이 아닙니까?”

마치 알고서 행동하는 사람처럼 그의 말은 질문이 아닌 이미 단정에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 매우 단정적이고 무례한 질문이군요”

“ 하지만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는 동의하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그렇다고 해도 그건 나의 문제이고 당신과 있을 이유가 되지 못하기도 해요”

마지못해 그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가방을 매고 나가려했다.

그는 ‘ 커피나 하고 가시죠 ’라는 말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그는 자신을 말을 실행하기위해 현관의 서있는 나를 향해 미소 짓고는 주방으로가 익숙한 동작으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코트와 가방을 무릎 위해 놓고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검은색의 가죽에 깔끔한 소파와 유리탁자 외에도 스틸로 된 조각 두서너 점. 그리고 책이 전부였다. 아늑함보다는 이용하기 쉬운 그냥 심플하고 모던 그 자체였다.

집안의 모든 것이 그렇게 나와 닮아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그 모습들.

그렇지만 그 속에 사는 주인은 온기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머그컵 가득히 블루마운틴을 따라서 나에게 건네고 그는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사실 정우씨를 저 방에서 주무시게 하려고 모셔온거 거든요”

닫혀 있는 문 중 하나를 가리키는 그는 머슥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느낄 정도로 잠깐 동안만 말이다.

“ 하지만 이제는 집으로 가실 생각이 드셨을 것 같군요”

나는 커피에 집중하면서 그의 눈길과 말을 피했다.

나는 지금도 집에 가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또 들키기 전에, 그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말이 나에게서 뛰쳐나오기 전에 나는 일어서야 했다.

“ 커피 잘 마셨어요”

잔을 내려놓고 나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현관까지 나오는 그는 나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 데려다 드려도 될까요? ”

그는 다시 한 번 질문이 아닌 강력한 요구를 품고 있었다.

“ 아니오”

“ 그럼 다시 뵐 수 있을까요? ”

“ 그럴 것 같지 않네요. 하지만 오늘 유쾌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나는 기억에서 지워야 하는 사람에게 의무적인 인사치레를 하고 있었다.

‘ 과연 나의 표정은 어떨까? ‘

‘ 냉정하게 보일까?’

그와 나는 또 다시 침묵에 잠긴 채 큰 길로 나왔다.

얼마지 않아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섰고 그는 택시 문을 열어 나를 태웠다.

오랫동안 문을 닫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지만 타지는 않고 문을 닫았다.

 

AM 5시 13분

 

집으로 향하는 동안 사무치게 슬픔이 밀려들었다.

어떤 상실감. 그의 집에 두고 온 어떤 감정.

택시에서 내려 집 앞에서 섰을 때 이미 눈가는 젖어 있었다.

그의 집에 두고 온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도 눈물조차 아니 흐느낌까지 억누르고 용서치 않은 냉정이었다.

집은 어둠 속에 잠겨 희미하게 깜박이는 경보등만이 다른 이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담에 기대어 서서히 주저앉았다.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전신을 흔드는 눈물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시작처럼 부지불식간에 멈추기 바라며 그대로 흐르도록 인정해야만 한다.

시간은 어둠 속에서 좀 먹어들어 가듯 흘렀고 나는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 자리에서 죽은 듯 잠들고 싶었다.

1년전.

오늘 어머니가 실려 나갔듯이 움직임도 없이 눈을 감고 그렇게 힘겹게 숨쉬고 있었다.

그런 힘겨움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순간과 순간의 접점 어디에선가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나는 제발 이대로 죽게 해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목과 입 속에서 맴돌 뿐 가는 신음만 그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부축 받으며 차에 태워졌다.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향수, 강하게 다가드는 손길.

그인 것같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것 같다는 것을 인지 한 것 뿐인데 기분이 안정되어 갔다.

나는 살아 있다는 작은 숨소리까지 힘겨웠다. 하지만 항상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감정의 고리가, 끊임없는 고통으로 나를 이끌던 고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지 않아도, 다시 숨을 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진실로.

그는 다시 나를 부축해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아까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했지만 지금은 나는 나약해져있었다.

그는 나를 방에 눕혀 놓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여전히 숨쉬는 것까지 힘겨워하는 나를 그는 천천히 꽉 잠긴 단추를 풀어주고는 물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아 주는 것을 알았다.

삶의 반대쪽을 한 발을 담긴 그 순간에도 육신의 감각은 그것을 인지해 내게 알려 주었다.

햇살이 어렴풋이 커튼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지독히도 그리고 고집스럽게 내게 눈을 뜨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력도 낼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와 방으로 들어왔다.

중년인 듯한 그 여자는 그와 작게 속삭이지만 이야기 내용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 죄송합니다. 형수님 ”

“ 아니예요. 도련님. 우리 도련님이 부탁이라는 것을 자주 했으면 해요. 근데 이 아가씨인가여?”

“ 네. 탈진한 것 같은데 의식이 없네요. 병원에 갈까 했지만 깨어나서 싫어할 것 같아서요”

그는 여자가 나가라고 했는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 여자는 천천히 내 상태를 살피고 간단하게 링겔을 꽂았다.

그녀는 내가 링겔을 맞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의 숨이 고르게 되자 그의 큰 티셔츠와 바지를 입혀주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지쳐 지금의 상황을 모두 기억하길 포기하고 깊이 잠이 들었다.

죽음과 닮아 있고 맞닿아 있는 듯했지만 결코 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진한 커피향에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듯 의식이 눈을 뜨길 원했다.

희미하게 사물을 보이던 것이 점점 선명하게 윤곽을 잡을 수 있었고 완전히 눈을 떴을 때는 창문커튼 사이를 비집고 저녁노을이 새어들어 방 안에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집이라는 것은 깨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다만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집에서 그에게 관찰대상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주방을 향했다.

그는 내가 일어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잘 잤어요?”

그는 약간의 미소 함께 그렇게 물었다.

“제가 얼마나 잤나요?”

그의 물음에 다시 질문을 던지며 주방의자에 앉았다.

서있는 기력이 없었다.

“한 이틀. 거의 삼일인 것 같군요”

“단 한번 깨지도 않고 자던군요. 마치 평생 자본적 없는 사람처럼 깊게”

그는 다 차려 진 식탁 맞은편에 앉아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폐가 많았군요 근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아셨죠?”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른 일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판단하고 행동할 일이었다.

차라리 죽었다면 이 지독히도 가시지 않는 냉기 도는 마음이 더 이상의 경계심을 발효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난 그에 대한 감정이 정말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었다.

내 자신에 대한 이율배반이다.

용서 할 수 도 용서 될 수 없는 지독한 어떤 감정.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 친구 당신 친구에게 다시 저에게 이렇게 된거죠.

당신이 혹시라 생각하는 미행 아닌“

“그렇군요. 감사드려요. 상관없는. 아무상관 없는 절”

“상관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정우씨도 알지 않습니까?”

“아니오. 도가 지나친 관심 이제 끝냈으면 합니다”

자리를 일어서자 현기증이 일었다. 나의 부축하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나를 감쌌다.

내가 곧 그에게서 벗어나자 그가 다시 부축하려 했지만 난 한 발짝 그에게서 물러섰다.

나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따뜻한 체온으로 돌아가고자하는 열망으로부터 나를 지켜야했다. 그의 따듯한 체온에 중독되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깔끔히 세탁되어 옷장에 걸려있는 내 옷을 발견했다.

세탁소 비닐에 감겨 있는 나의 옷은 내 것이 아닌 듯 했다.

지독한 냉기를 내 옷으로 밀어 놓고 나만 빠져 나온 것 같았다.

세탁소 비닐을 찢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금 잔인하고 지독한 나의 냉기의 갑옷으로 무장할 수 있을 듯싶었다.

다시 나로 돌아온 것이다.

가방을 집어 들고 현관을 향했다.

그는 아까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리 그대로 앉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마웠어요. 전 이만 갈께요”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퍼졌다.

그는 대답도 미동도 없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쓸어내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12월 19일

 

PM 7시 3분

 

너무나 힘이든 일이었다.

그의 공간에서 나의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내 영혼에 새겨진 그 약속에 무게는 아직 가벼워지지 않았다.

끝이 없고 시작만 존재하는 약속. 어머니의 죽음으로 나도 같이 묻혔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다시금 잠이 들었다.

매섭게 나에게 질책하는 목소리가 가득한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내게 죽음을 강요했다.

그것들은 나의 숨통을 조이며 삶을 포기하게 하려했다.

“손님~ 손님~”

기사는 내가 신음하며 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차를 세우고 나를 깨우고 있었다.

“괜찮아요? 가까운 병원으로 갈까요?”

기사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니오. 집으로 가면되요. 집으로”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자 가정부 아줌마가 못마땅한 시선이 나를 맞이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방을 향해 걸었다.

힘이라고 다 고갈되 사라진 몸뚱이가 타인의 시선에는 태연하며 오만해 보이기까지 바라는 나의 마음에 순응했다.

방문을 닫는 순간 익숙한 유화 물감이 나를 감쌌다.

절대 안전의 향기 속에 나는 침대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12월 26일

 

PM 10시 39분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링겔병과 간호사가 보였다.

“아가씨. 몸살에 폐렴까지 위험한 상태였어요.”

그녀 묻지도 않은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지금이 몇일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그 사실을 말해 줄지 의문이었다.

링겔를 빼서 간호사가 나가자 겨우 침대에서 일어날 자유가 주어졌다.

책상 위에 전원이 나간 핸드폰 밧데리를 갈아 끼우고 날짜를 보았다.

그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흘러 있었다.

어머니의 기일이 열흘이 지나 있었다.

핸드폰을 침묵에서 벗어나자 그 동안 뱉어 내지 못한 소식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 메시지었다.

“잘 도착했습니까?”

삭제 버튼을 눌렀다.

“대답조차 없으시군요.”

저음에 자조적인 말투였다.

“알겠습니다.”

세 통의 음성메세지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는 과연 나에게 무엇을 바란 걸까?‘

나머지 음성은 간호사가 들어와 호들갑을 떨어 지우지 못한 채 내버려두어졌다.

지울 의지가 없는 내 자신의 변명인걸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간호사는 내 강력한 거부의사에 저녁때 돌아갔고 방에 혼자 남은 나는 방의 유화그림을 하나씩 갈증과 같은 목마름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만을 아시던 연약한 분이셨다.

늘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 하셨고 어린 딸에게 슬픔만을 가르쳐 주셨던 분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미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따뜻함이라는 감정을 어렴풋이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었기에 미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내게 인정 할 수 없는 사건이다.

어쩌면 따뜻함의 목마름을 가르쳐 준 어머니를 미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할지도...

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차키와 핸드폰, 가방을 집어 들고 집을 나왔다.

밖은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엷지만 분명한 푸른 색조로 나를 더 반기는 듯 했다.

새벽이 깨어지기 전의 모습이 나를 잠시 멈추게 하였지만 곧 차를 몰고 달렸다.

흰 국화를 살 때 제외하고는 나는 계속 달렸다.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에서 열 하루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화장되어 늘 좋아하시던 강에 뿌려드렸다.

차바퀴가 작은 먼지구름을 내고는 멈춰 섰다.

이곳은 자주는 아니지만 그녀와 내가 스케치 여행을 오던 곳이다.

늘 겨울에 삭막함이 사무칠 때면 그녀는 나를 데리고 이 곳에서 열흘이고 한 달이고 혹은...

나를 잊은 채 서울 올라가 버리기도 했다.

살얼음이 어는 황량한 강가에 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으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동네 주민들이 경찰서에 미아신고를 했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집의 운전기사가 데리러 왔다.

그렇게 지독한 겨울에 냉정한 추억이 있는가 하면 아주 드물게 내 손을 잡아주던 그녀의 기억이 따뜻하게 자리잡아있다.

얼음조각들이 묻어나는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 유일한 안식처였던 손길.

그 손길에 담겨있는 무심한 속에 따뜻함이 이율배반임을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다.

국화를 집어 들고 강가를 향해 걸어갔다.

흰 국화의 향기가 차가운 냉기에 죽어가고 있었다.

살짝금씩 내 뺨을 타고 내리며 물이 되는 흰눈과 닮은 흰 국화는 몸서리치며 향기를 잃어감을 비통해했다.

강가에 다다르자 또 한 번의 추억이 나를 향해 비웃는다.

9살의 나이.

오늘처럼 눈이 내리고 있던 날 어머니는 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나무로 된 흰 조각배에 나를 태우고 강 한가운데로 나아가게 했다.

줄은 꼭 내가 강 가운데 갈 때까지 풀리고..... 풀리고..... 풀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나를 두고 가버렸다.

그 추운 겨울날 아무도 강가에 오지 않았고 밤이 깊어 가도록 내리던 눈과 함께 난 그곳에 서있었다.

다음날 운전기사는 나를 데리러 왔고 강가에 내려서서 그녀가 완성한 초상화를 보았다.

“마치 내가 이 속에 있는 거 같아요 아저씨? 엄만 내가 그림인 줄 알고 그냥 가신 것 같아요.”

운전기사는 나의 창백한 말에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죽을 듯 아팠었다. 하지만 일주일동안 고통을 무시하듯 열병에서 살아나고 말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가정부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지독한 하루하루였다.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어머니를 향해 어머니 화실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그 곳에 없었다.

아버지가 요양소에 보내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죽기 2년 전에야 집으로 다시 오실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다만 이제 아버지도 그림도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에 목말라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따뜻함이, 그녀의 무심함 속에 숨겨 둔 내 보물을 잃어버리고 돌아왔다.

그녀는 더 이상 나의 그녀가 아니었다.

나의 마지막 보루였던 감정이 아버지에 의해 부서지고 어머니에 의해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은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강에 국화의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멀리 던졌다.

강 위에 붉은 코트를 입은 아이가 흰 나무 조각 배에 서 있었다.

아이는 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창백한 눈물 한 줄기가 나를 그 아이에게로 나아가게 했다.

창백하게 맺혀지는 눈물만을 바라보면 물을 헤치고 나아가고 나아가서.

조각배의 아이를 안았다.

하지만 나의 체온은 존재치 않았다.

아이보다 더 싸늘하고 식어 있는 건 나의 정체였다.

그게 나였다.

강물의 냉기가 내 몸으로 뿌리 깊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러한 감각이 무디어져 갈 때 쯤 나는 의식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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