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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D/[film] Remember

Remember 원작 단편소설 " 眞心"

나는 분명히 자고 있었다.

반지하방 안전하고 아늑한 나의 공간 안에 얌전히.

그는 아무런 낌새도 없이 내 꿈에 찾아와 그의 전염성 강한 미소를 가득 내 눈에 새겨 놓고 있었다.

가을 하늘, 맑은 푸르름을 등 뒤에 그림처럼 두르고 미소 짓는 그 모습에 나는 숨을 급하게 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벽면만 가득히 풍경으로 삼고 있는 창문을 초점 잃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실상 나는 어디도, 어떤 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꿈속에서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는 그의 미소 속에 잠겨 현실의 공간이 지워지고 없었다.

그 몽환에서 나를 깨운 것은 핸드폰 알람소리였다. 매일 아침 출근을 종용하는 잔소리같은 알람이 오늘은 왠지 고마웠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전신 거울에서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 살펴보고 있었지만 내 안에서 시선은 옷 안에 감추어진 나신을 하나씩 더듬어 보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 새하얀 목, 긴 호흡에 오르내리는 가슴, 평평한 배, 음모에 가려진 둔부, 무력한 다리.

내 잔잔한 육신 안에서는 오래 전에 있었던 감각에 기억들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출근을 위해, 꿈에 지배 받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에 노곤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돌려놓으려고 이성과 감정 사이의 전쟁이 격렬히 치루어졌지만, 결국 빨갛게 달아오른 감정이 승리의 트로피를 쥐듯 낡고 두꺼운 시집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 가방 안에 넣었다. 한층 더 가라앉은 가방 속, 시집에 무게만큼 감정이 한 층 더 무게를 가지고 내 안에 자리 잡는다.

이미... 버린 줄 알았던 감정들이 전신을 휘감아 버리고 말았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노곤한 감각들마저 빨갛게 달아오른 감정에 함몰되어 자취가 없다. 그러는 사이 내릴 역을 지나쳐 버린 아침에 혼란이 한 층 깊은 괴롭힘으로 다가온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계단을 다급하게 오르던 나와 부딪힌 사람이 인형의 배를 누르면 녹음된 말이 흘러나오듯 중얼거리는 습관적인 짧은 사과의 말을 내뱉고, 지하철 계단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의 말투, 그의 목소리.

짧게 스쳐가는 그의 얼굴이 계속 내 눈 앞에서 살아서 숨 쉬고 있다.

또 다시 현실의 시공간이 어그러져서 나를 가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꿈도, 거짓도, 환상도 아니었다. 바로 그였다.

멈추었던 숨을 내쉬고 그를 쫓아 계단을 내달렸다.

마구 달려 나가는 말처럼 지하철 안은 나의 구두소리로 거칠고 분주했다.

새빨갛고 새파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면 미친 듯이 그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제발제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가지고 나오는 그를 보는 순간 세상은 아직 내 편에 서서 응원하고 있다는 강한 안도감에 전신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안락한 감정에 몸을 맡길 수만은 없었다. 그를 쫓아 지하철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어 3-2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그를 쫓아 3-4에서 눈으로 그를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그 조차 알 수 없는, 이 긴장감이 가득한 추격에 시간과 공간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조차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디뎌 골목길 안에서 주저앉았다.

세상에. 그였단 말인가.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짓을 수 있는 얼굴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손과 다리를 가지고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아니 신에게 하는 기도 따윈 필요 없다.

이건 나 자신을 위한 하나의 축제였다. 그 날 이후로 늘 기다린 축제.

핸드폰이 나의 기쁨에 차디찬 이성의 무게로 ‘회사’이름을 토해내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긴장으로 갈라지고 뭉툭해진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 축제의 장에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거짓말을 차례차례 늘어놓았다. 이후에 일은 어찌 되어도 좋았다.

얼마간의 긴장감과 흥분이 가라앉자 그가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 시간은 지루하지도 길지도 않은 또 한 번 현실에서 비켜나간 비연속 시공간으로서 나를 온전히 지켜주었다.

그가 전화통화를 하며 서둘러 건물에서 나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는 감정을 날뜀을 지그시 누르고 그의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쫓았다.

“ 장 남호입니다. 특약을 좀 강하게 넣었는데 어떠셨는지? 아...마음에 드신다고요. 오늘이요? 네 괜찮습니다. 그런 전에 뵙던... 아~ 아니오. 아닙니다. 제가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친절한 목소리와 말투. 8년 전 그날과 다름없는 분명한 그였다.

손목시계를 보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일정을 살피는 그의 모습은 단정한 샐러리맨 그 자체였다.

(은은한 황색톤의 코드와 회색톤 투버튼 양복, 흰 셔츠, 가볍고 실용적이게 보이는 검은색 서류가방,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붉은 색 바탕에 금박 체크 스티치의 넥타이)

그는 발걸음을 서둘러 걸었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에 알아 볼 수 있었을까.

그를 하나씩 8년 전 모습과 비교해보던 사이에 그는 목적지인 깔끔하지만 작은 까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서서 약간에 시간적 사이를 주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의식적으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그의 동작을 따라 흘러갔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이 남았는지 약간은 긴장이 풀린 얼굴에 입고 있던 코트을 벗었다. 양복 버튼도 풀렀다. 서류를 꺼내 살피던 그는 까페 종업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커피를 주문했다.

그가 눈치 챌까 조심스러웠던 나의 행동은 서류에서 거의 시선을 떼지 않는 그의 집중력에서 무의미해졌다.

그와 나. 우리와 상관없는 시간은 흘러갔지만, 우리의 시간은 정체되어 있었다.

더 이상 8년 전, 그가 아니라고 부정할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에 흥분하는 자신을 누르는 것이 힘겨웠다.

가방에서 낡은 시집을 천천히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고 표지를, 아니 그 책 속에 서린 시간을 더듬듯이 쓸어내렸다.

네 모서리는 너덜하게 일어나고 알 수 없는 얼룩들이 시집 겉에 지저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위해 6년이라는 세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가지고 다니던 책이었다. 포기라는 뼈아픈 결심으로 2년을 버려두었던 책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여기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 첫 장을 펼쳐 사랑에 아름다움이 한글자한글자 응축된 글귀들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사랑...사랑...사랑... 이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인가.

점점 많은 장수를 넘겨버리다가 나의 마음을 재빠르게 움켜잡아 그에게 다가갔다.

까페 안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찻잔소리도, 음악도, 지워지고 나의 가뿐 숨소리가 고막 안에 가득 차올랐다.

“ 장 남호 ”

나의 목소리는 조금에 떨림 없이 정확하게 그에게 가서 꽂혔다.

그는 나의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 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에게 와 닿지 않았다.

고막 가득 차오른 가뿐 숨소리가 나갈 공간을 찾아 내달리고 있었기에.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가 품에 달려들었다.

푸르른 하늘 안에 미소 짓는 그의 얼굴 위로 나의 처절하고 고통에 찬 비명과 옷이 찢겨져 나가는 소리만이 그 공간을 지배 했다.

남자의 외마디 숨을 내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시집 위로 튀는 나의 검붉은 피, 너덜해진 옷자락이 한데 엉켜서 그 날에 꿈이 아니었음을.

그의 끝으로 가는 숨소리에 더 깊게 그를 향해 안겨 들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내게 몸을 기대왔다.

툭툭.... 어디선가 끈적한 액체의 움직임이 손으로 바닥으로 감겨들며 들려 왔다.

바닥에 떨어지는 피들이 점점 농도 짙은 웅덩이를 만들어 간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지만 나의 귓가에서는 툭툭.... 아름다운 툭툭..

기대 오는 그의 무게를 느끼는 모든 감각들이 8년 전 그날 이후로 죽어 있던 나의 일부가 깊고 고른 숨소리가 내며, 툭툭..이라는 아름다운 선율에 안에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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